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빛의 문턱에 서서,
선생님께.

​​김계피 X 연두

이렇게 죽는 게 억울하더라고요.

그래서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고

숙소를 예약했습니다.

무슨 정신으로 비행기에 올랐는지

기억나지 않습니다.정신을 차렸을

때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였습니다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서비스

빛의 문턱에 서서,
선생님께.

 

 

선생님,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.

단 한 번도 저를 위해서 큰 돈을 써본 적이 없다는

말씀부터 드려야겠네요.

저는 단 한 번도 저를 위해서 백 단위의 돈을 써 본

적이 없습니다. 소소하게 쓴 적은 있지만 크게 저

를 위해서 쓴 적이 없습니다.그런 생각이 들자 생

각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습니다.

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가는 건 금방 이었습니다.

숨이 막혔고 눈물이 났습니다.문득 억울해졌습니

다.이렇게 죽는 게 억울하더라고요. 그래서 무작정

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예약했습니다.무슨 정

신으로 비행기에 올랐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.

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였습니다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갤러리

어둑한 저녁이 짙게 깔린 시간이었습니다.
숙소에 가방을 올려다 놓고 무작정 거리로
나와 걸었습니다. 바람에 섞인 비 냄새와
흐릿하게 젖어 있는 아스팔트, 짙고 옅은
어둠 위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제 그림자를
멍하니 쳐다봤습니다. 그런 제가 이 동네에
오랫동안 산 사람처럼 자연스러워 보였을까요.

사람이 몇 없는 공원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담
배를 꺼내 피웠습니다.하늘을 보는데 별의 위
치가 변해 있었습니다. 그제야 제가 다른 곳으
로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습니다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갤러리

여행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.
삶이라는 건 무엇일까요.

선생님, 삶은 사실 캄캄한 어둠 속을 걷는
일과 같은 게 아닐까요. 멀리 있는 빛을 보
면서컴컴한 벽을 더듬으며 걷는 일 말입니다.
선생님,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.

제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겪은 일을 하나 말씀
드리겠습니다. 며칠째였는지 모르겠지만
하루는 정전이 됐었습니다. 저는 겁도 없이 밖으
로 나갔습니다. 배가 고파 가게의 문을열려고 했
는데 안에 있는 사람이 저지했습니다. 옆의 가게
도, 그 옆의 가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. 왜 안에
사람이 있는데 들어가지 못하는지 저는 의아했습
니다.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.


문을 연 가게가 나올 때까지 걸었습니다.
들어가서 아무 음식이나 시켜서 먹으며 한국에
있는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.
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, 이상하지 않으냐고
말하자 애인이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
했습니다.

외국은 정전이 되면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무장
하니까 절대로 가게의 문에 다가가지 말라고 하
더군요.



최악의 상황,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.

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만, 정전된
거리로 곧바로 돌아왔습니다.정전이 된 가게를
돌아보면서 안에서 웅크린 채 총을 쥐고 있을
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.누군가 침입할 것을 대
비해 총을 쥐고서 가만히, 아까도 저를 향해서
겨눠졌을 총구를 삼인칭의 시점으로 생각했습
니다. 영화처럼 말입니다.


선생님께서는 저의 이 버릇에 병명을 붙여주셨
죠.해리성 장애라고 하셨나요? 정확한 명칭에
는관심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슷한
이름이겠죠.해리 포터가 생각나는 멋진 이름이
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, 선생님. 저는 정전
이 된 거리 속에서 어둠을 더듬거리며 총구를
가만가만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배가
고파하는 저의 모습을 삼자의 시선으로
생각했습니다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갤러리

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.

사람은 각자의 어둠 속에서 각자의
빛을 찾아 더듬거리는 존재라고요.
저에게 빛은 그 가게였지만 그들에
게 저는 빛이 아니었습니다.
그들에게 빛은 글쎄요,

진짜 빛이었을까요.

아니면 손에 쥔 총이었을까요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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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이미지

각자의 빛이라는 건 무엇일까요.


저에게도 빛이 있을까요. 가끔은 캄캄한
삶에 갇혀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기
분입니다.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풍경이
있기는 합니다.

 
블라디보스토크 숙소에서 몇 걸음 가면 있던
바다입니다. 광장에서 오 분 정도 걸어가면
있던 바다, 
파도가 유난스럽던 바다입니다.
겨울에는 꽝꽝 얼어 스케이트를 탈 수 있다고
러시아 친구가 말해줬습니다.그 바다가 삶이
유난하던 저에게 시리도록 반짝였습니다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갤러리

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.
 
사진은 왜 그렇게 흐릿한지 모르겠지만
기억 속에서 그 바다는 선명합니다.

오 분, 오 분만 걸으면 그렇게 아름다운
바다가 보인다는 점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
제가 묶던 숙소의 매력적인 점이었습니다.


선생님, 제 삶에도 오 분만 참고 걸으면
광활한 바다가 나올까요.



빛이 보일까요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갤러리

선생님, 삶이라는 여행이 계속
될 수 있을까요.




제게도 그런 것이 허락될까요.
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텍스트
빛의 문턱에 서서, 선생님께.: 갤러리

시린 겨울, 애정 하는 선생님께.
김계피 드림.

​​글: 김계피  그림: 연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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